‘저를 사장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KH라고 부르세요’ 이달 초, 삼성전자 임직원들이 경계현 사장에게서 받은 이메일이죠.

앞서 삼성전자는 매년 2월 마지막 날 하던 부장급 이하 직급 승진 명단 발표를 하던 ‘전통’을 없앴습니다. 대상자에게만 통보했을 뿐 공개하지 않은 것인데요.
이에 ‘나 승진했다’라고 먼저 얘기하지 않으면 누가 승진했는지 알 수 없게 된 것이죠.

삼성전자에 근무 중인 직원은 “지난해 이맘때였으면 축하 인사와 한턱 얘기로 시끌벅적했을 텐데 올해는 조용합니다”라며 내부 분위기를 전하기도 했는데요.
차장급 직원인 A 씨는 “같은 부서에서는 알음알음 누가 승진했는지 소문이 나지만 그래도 예전처럼 축하 회식을 하는 분위기는 아니다”라며 “2월 말 인사철마다 회사 근처 식당에 예약 전화를 돌리던 것은 이제 옛일이 됐다”라고 말했습니다.

국내 주요 기업들 사이에 ‘직급 파괴’는 유행을 넘어서 필수가 되고 있는데요. 최소 3~5년이 필요했던 승진 연한을 없애거나, 6개 직급을 하나로 통합하는 기업도 크게 늘었죠.
‘사원-대리-과장-차장-부장-상무-전무-부사장-사장’이라는 직급이 남아 있는 조직은 ‘꼰대’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에 사장·일반 사원할 것 없이 모든 직원을 서로 ‘님’으로 부르고, 아예 직급이나 승진을 없애는 회사도 많죠.

삼성전자도 지난해 말 발표한 인사제도 개편안에 따라 올해부터 계급장 떼기에 나섰는데요. 최근 회사 인트라넷에 있던 직원들의 직급 정보를 가리고 입사 연도를 알 수 없게 사번도 삭제합니다.
그동안 조직도와 함께 직급이 표시됐다면 이제는 각 부서 직원이 가나다 순서로 표시되어 있죠.
앞서 2017년 삼성전자는 사내에 수평적인 문화를 심는다는 목적 하에 직급을 단순화하고 직원 간 호칭을 ‘님’과 ‘프로’ 등으로 통일했죠.

하지만 인트라넷을 통해 CL(커리어레벨)등급 검색이 가능해 연공서열을 따지는 분위기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는데요. 실제 상급자는 하급자에게 ‘김 프로’라고 부르지만 하급자는 상급자에게 ‘이 프로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올해 들어 직급과 입사연도, 사번마저 삭제하며 ‘계급장’떼기에 나섰는데요. 부서가 다를 경우 직급을 모르기 때문에 좀 더 수평적인 업무 분위기가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하였죠.
게다가 삼성전자는 직급별로 승진을 위해 채워야 하는 기간도 대폭 줄여 능력만 된다면 30대 임원을 목표로 할 수 있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이처럼 직급과 연차 중심의 연공서열 대신 자유로운 의사소통과 성과를 중시하는 인사·보상 체계는 글로벌 빅테크를 이끄는 실리콘 밸리에서 도입해온 시스템인데요.
실제 실리콘밸리에서는 입사 1~2년 차 직원도 언제든 임원에게 아이디어를 제안하거나 보고할 수 있기 때문에 빠른 의사 결정이 가능하죠.
또한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어 성과 보상도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4차 산업혁명과 코로나19 사태, MZ 세대 직원 증가 등 안팎의 변화로 생존을 위해 기업들이 변화에 나설 수 없었다고 분석했죠.
직급 표기 삭제에 대해 삼성전자 직원들은 상반된 반응을 보이는데요.
고참 직원들은 직급을 알 수 없으니 연차나 업무 책임 정도를 파악하기 어려워 불편하다는 의견을 제기합니다.

반면 MZ세대 직원들의 의견은 달랐는데요. 일하는 과정에서 직급이나 연차가 개입될 여지가 작아져 업무 자체에 더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죠.
또한 상대방이 부장이든 대리든 예의를 갖춰서 말한다면 문제 될 일은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일부 직원들은 직급이나 호칭을 바꾼다고 수평적 문화가 만들어지는 것을 기대하는 건 일차원적 생각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는데요.

직장인들에게 일을 하게 만드는 원동력은 확실한 보상이며 그중 하나가 승진과 직급 대우라는 것이죠.
그런 ‘맛’을 없애니 아쉬울 법도 한데요. 직급 파괴, 연차 파괴가 기업 운영의 합리적인 방법이 될지 그 결과는 조금 더 지켜보아야 할 것 같네요.